지난 11월 28일부터 1월 10일 현재까지 발생 40일 만에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가축이 140만 마리를 넘어섰다. 나는 문득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 10월 22일부터 3개월 기간을 정하고 육식을 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여 명의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안도한 것은 혹 전염된 육류를 먹을지 모르는 위험을 피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상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확산되어 정부며 민간이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이때, 나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였다. 채식(유제품과 달걀까지 금하되 생선은 허용하는 채식) 실험에 돌입하게 된 것은, 현대의 반생명적 축산업과 과도한 육식 문화에 의해 처참히 생이 짓이겨지고 있는 동물들의 생명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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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과 함께 한 채식 모임 모임에 앞서 홍순관의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를 듣고 있다. |
ⓒ 최봉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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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러한 목표에 모두가 선뜻 발벗고 나선 것은 아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먹고 싶으면 고기를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옆에서 육류 안 먹기를 한다고 해도 내 일 아닌 걸로 생각했다"는 이도 있었고. 단백질 섭취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선뜻 용기를 내기 어려웠던 이들도 있었다.
육류를 안 먹는다고 하면 듣는 이들은 대번에 어떤 반감을 품곤 한다. "고기를 통한 영양 섭취가 필요한 거 아닌가",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니네 잘났다." 우리도 이 실험에 들어가고 공부를 하기 전까지 다르지 않았다. 육식을 안 하는 일이 '신의 도움'을 간구해야 할 정도로 불가능한 일로 느껴졌다. ①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오랜 공적, 사적 교육이 심어준 강박관념과 ② 오랫동안 고기 맛에 길들여진 입맛, ③ 온 천지에 널린 고기집과 집 대문까지 쫓아와 유혹하는 치킨 집 광고 전단지가 차마 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중독에 가까운 식탐과 과도한 육식 문화의 주범이다. 그 누가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을까.
수년 전, 한 친구의 어머님께서 입원을 하신 일이 있다. 병문안을 갔다가 그 어머님이 닭 공장에서 닭을 다듬고 손질하는 일을 밤 12시까지 하다가 과로로 쓰러지셨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우리들이 흥청망청 소비하는 닭을 공급하기 위해 누군가가 그토록 중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좋아하던 치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가축이 140만 마리가 넘어섰으니 그동안 우리가 먹어치운 동물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상상이 안 간다.
오늘(1월 11일) 자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돼지 수요는 10년 새 최대 규모며, 2년 전에 비해 80만 마리나 늘었다. 그나마 구제역 같은 질병이 일어나면 육류 소비가 잠시 감소하지만 곧바로 정부와 언론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점을 적극 강조해 다시 과도한 육류 소비를 계속 유도하게 된다. 그 소비를 지탱하기 위해 수많은 가축이 꼼짝달싹 못하는 감옥 같은 창살 속에서 항생제와 몸에 맞지 않은 외국 사료에 의존하며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사리 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반생명적이고 잔인한 현대 축산업 과정을 반대하는 의미로 다양한 어려움과 부담을 떨치고, 함께하는 이들의 용기에 의지해 하나둘 채식 실험에 동참하기로 결단했다.
우선 우리는 이것을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홀로는 내적 욕망(식탐)과, 외적
(위 세 가지의 전방위적인) 유혹을 결코 견뎌내기 어렵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했다. 함께해 갈 때 내외적 유혹을 조금은 더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서로서로 결심을 '지켜주는' 도움이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도무지 못하겠는 두려움과 걱정은 결단하는 지점을 넘어서자마자 금세 꼬리를 내리며 어딘가로 달아나 버렸다. 홀로 있으면서 무얼 먹을지 결정해야 할 때, 혹은 함께 있으면서 어느 식당에 갈지 결정해야 할 때, 고기를 피하고 유제품을 피해 먹을거리를 찾고 결정하는 일이 마치 '놀이'같이 여겨졌다.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이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여러분도 함 해 보세요. 재밌어요.)
사람들은 남들 하는 거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런 욕망이 서로에게 모두 유익한 욕망, 서로를 살리는 욕망이면 좋겠다. 같이 하면 정말 즐겁다. 그런데 그 즐거운 일, 서로를 망치는 일이 아닌 서로를 살리는 일로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는 함께하면서 무척 즐겁고 재밌었다. 그 핑계로 함께 만날 일을 더 만드니 그것도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육식에 쉽게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 채식 음식을 더 찾고 만들어 먹는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육식 안 해도 먹을 게 널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쁘게 확인했다.
나는 채식가는 아니지만, 이번까지 쳐서 기간을 정해 채식을 실천한 것이 세 차례다. 그런데 이번에 채식을 하면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 이전에 채식을 할 때는(그때도 다른 여러 친구들과 함께했다), 그 친구들이 직장이나 친구들,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눈총을 많이 받았다. 한마디로 '유별나다고'. 그런데 이번에 함께 채식을 하는 친구들이 훈훈한 소식을 전해왔다. 직장이나 가족, 혹은 친구들이 육식을 하지 않는 친구들을 배려해 식당을 고르고, 때로는 간식까지 가려 챙겨왔다. 물론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눈길도 없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사뭇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 2008년 광우병 파동을 거치면서 먹을거리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나 싶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연스레 '육식'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채식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우리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각자에게 일어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함께한 친구들 중에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친구도 있었고,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오랜 세월 어려움을 겪던 친구도 있었다. 환절기만 되면 비염을 앓던 친구도 있었다. 또 무엇보다 '피곤'을 쉽사리 느끼는 생활이 대부분의 공통적 증상이었다. 그런데 채식에 들어간 1주일 만에 한결같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볍다"고 했다. 거기다 이래저래 크고 작게 문제를 겪고 있던 몸의 변화를 확인했다. 피부병을 앓던 친구는 확실히 몸이 덜 가렵고 피부 질환이 눈에 띄게 호전됐다. 어린 시절부터 두통을 겪던 친구는 두통이 사라졌다. (물론 이 친구는 패스트푸드 음식과 치킨 등을 즐겨 먹던 친구인데 채식을 실천하며 하루 2끼, 그리고 현미식을 실천했다). 환절기마다 휴지로 코 풀기 바빴던 친구도 있었는데, 우연히 길을 가다 그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 너 이번에는 비염 안 걸리고 그냥 지나가네?"
"어, 그러네."
우리는 조금만 더 깨어 민감히 우리 몸을 살펴보고 우리의 일상을 성찰하면, 내 몸이 어떻게 이상하고 또 내 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의학적 검사보다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먹을거리를 변화시킴을 통해 웬만한 병은 다 다스릴 수 있으며, 더구나 우리 몸의 회복 능력은 우리에게 그러한 기회를 무수히 제공한다.
채식을 실천하는 3개월의 기간 동안 우리 스스로가 임상실험을 한 셈이다. 나는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몸이 피곤하다는 것이 어떤 건지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 정도 몸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고, 커피로 피곤을 달래며 살았다. 하지만 채식을 하는 내내 나는 지금 너무 피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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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과 먹을거리 관련 도서 공부는 실천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진실에 직면할 때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
ⓒ 최봉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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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단식은 굶고 있는 몸에 정신이 협력해야 한다"는 간디의 충고를 기억하기로 했다. 채식을 실천하는 3개월 간 정신이 몸에 협력하기 위해 현대 사회의 먹을거리와 건강의 문제에 대해 함께 공부해 가기로 했다. 책은 자유롭게 선정해서 자유롭게 읽고 또 돌려 읽으며, 격주마다 모여 느낌과 소감을 함께 모여 나누고 글로도 공유했다. 우리가 읽은 책들은 <먹을 거리 위기와 로컬 푸드>, <밥상혁명>,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사람을 살리는 단채식>, <불멸의 건강 진리>, <돌파리 잔소리>, <먹기 싫은 음식이 사람을 살린다>, <패스트푸드의 제국> 등이다.
단채식 기간 후반부가 되면서 우리는 마지막으로는 베스킨라빈스의 상속자였던 존 로빈스가 쓴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1, 2)를 모두 함께 읽고 있다. 공장식 사육의 생생한 참상과 철저히 자기 이익만을 위해 동물의 생명과 소비자의 건강은 아랑곳없는 이익집단의 실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푸드 주식회사>도 함께 보았다. 이를 통해 신자본주의 문명이 먹을거리 문제를 어떻게 '죄악'이 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목격했다. 그리고 2개월 20일을 지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개안(開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한다. 대략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공부는 우리의 실천에 영혼을 불어 넣어 주었다. 우리가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뜨거운 가슴과 심장으로 육식에 대한 고민을 심화하고, 하루 세 번 혹은 하루 수차례 먹을거리 앞에서 매번 결단하고 다짐할 수 있었다. 함께한 친구들의 고백이다.
"지금의 현 상황이 나의 무책임과 무관심이 초래한 현실임을 알게 된다. 먹거리 문제에 대한 고민은 '생명'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졌다. 공부를 하면서 이것이 단지 먹거리에 대한 공부가 아니라 세상을 바로 보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먹는 문제로 굳이 공부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다. 내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거리 변화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에 온 존재로 저항하는 것임을 알았다."
지난 주말을 지나며 마침내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공장식 사육과 완전 수입 사료의 문제점, 반생명적인 생매장 등을 비판하는 기사와 칼럼이 계속 게재되고 있다. 그 가운데 '아 우리가 이렇게 채식을 실천해 보고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싶다. 하지만 자연을 거스르고 생명의 존엄성을 짓밟는 이러한 현실은 너무도 거대하고 강고하게 우리의 일상 깊숙이, 그리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지경으로 광범위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 구제역이 이토록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는 상황에서 존 로빈스의 경고를 결코 귓등으로 흘려들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그냥 우리가 육식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저절로 이루어질 것도, 가끔가다 한 번씩 행진을 하고 기부를 하고 로비를 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 전부를 필요로 할 것이며, 우리가 지금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형태로 우리의 헌신을 요구할 것이다."
연일 구제역 대응의 총체적 부실을 지적하는 기사가 올라온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손 놓고 있어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재산과 같은 가축을 산 채로 묻어야 하고 경제적 향방을 가늠할 수 없이 가게 경제가 몰락할 위험에 처한 전국 축산 농가의 시름을 생각하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시름과 더불어, 아니 그보다 앞서 자연의 법칙에 반하여 사육되고 산 채로 대량 학살을 당하고 있는 아무 죄 없는 동물들의 고통과 비극을 돌아보는 게 더 시급한 일일 것 같다. 이 문제 앞에 깊은 성찰과 의미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할 주체는 정부 당국과 축산업자들뿐 아니라, 무분별한 육류 소비에 절어 있던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왜곡되고 뒤틀린 동물의 현실은 고스란히 우리 몸의 왜곡으로 반사된다. 동물들의 병은 고스란히 인간이 초래한 병이기에 결코 남 일이 아니다. 또한 어떤 생명도 그렇게 함부로 다뤄져도 되는 존재는 없다. 다큐멘터리 <푸드 주식회사> 엔딩은 다음의 자막으로 처리된다.
"우리는 하루 세 번씩 투표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떤 생활양식을 구현하는지가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표를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이기에 소비자인 우리의 힘은 강하다."
이제 우리들의 채식 실험 3개월의 기간이 다 끝나가고 있다. 아직 그 누구도 단호히 채식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깊은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현실을 끝갈 데까지 방치하고 있는 우리의 무감각의 병과 우리의 욕망 때문에 처참한 지경 속에 위태롭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동물들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음 모임 때는 3개월간의 실천과 공부를 통해 우리가 곱씹고 다짐하고 돌이켜야 할 바들을 생각하고 정리해서 함께 나누기로 했다.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마지막 한 가지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공부와 실천과 고민이 담긴 소박한 먹을거리를 손수 준비해 와 함께 만찬을 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 땅의 먹을거리 문화가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뜻과 마음을 간절히 모으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이 짓밟힘을 당한 뭇 생명들의 넋을 위로하며 속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그 존재의 안녕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채 내 입의 즐거움에 안주하고 내 배를 채우기에 바쁜 인생을 조금이라도 돌이켜, 돌이켜 갈 수 있기를 부디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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