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환경교육' 이벤트 아니다
keen 사무처
안만홍 사무처장(환경교육연구지원센터) 박순주 psj29@hkbs.co.kr
생태 체험학습 주체를 망각한 행동
자연체험 이벤트성 도구화 ‘주객전도’
지난해 여름 대부도 갯벌에는 한 무리의 유치원 아이들이 올망졸망한 모습으로 한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를, 다른 한손에는 아이들이 조금 버거워 보이는 호미를 들고 나타났다.
초등학교 한 반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두 명씩 짝을 짓고 길게 서서 줄 맞춰 갯벌로 이동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맨 앞에는 큰 삽을 든 건장한 청년이, 맨 뒤에는 치마 입고 화사함을 자랑하듯 옷맵시가 한껏 돋보이는 교사로 보이는 여성이 동행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지시하는 모양새를 보니 담임교사임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은 신발을 신고 줄 서서 갯벌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앞줄 건장한 청년의 지시에 따라 갯벌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열심히 호미질을 해댄다. 어떤 아이는 호미가 무거운지 그냥 내버려둔 채 펄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어떤 아이는 마치 무언가에 보복이라도 하듯 열심히 호미로 펄을 내리치고 있다.
아이들도 스트레스가 쌓이니 아마도 해소 차원이겠지 하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담으려고 가져왔는지 모를 까만 비닐봉지는 그냥 갯벌에 내팽개쳐진 채 개흙으로 범벅이 돼 갔다. 유심히 보니 앞장서 가던 삽을 든 청년이 연방 땀을 흘리며 갯벌에 대고 삽질을 하고 있다. 조개 등을 캐기 위한 행위일 거라 짐작은 가지만, 조개가 그리 쉽게 발견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청년의 삽질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30여 분이 지나니 담임교사가 옷에 펄이 묻을까봐 조심스레 아이들에게 다가가서는 나가자고 이끈다. 펄에 내팽개쳐진 비닐봉지를 그대로 둔 채 나오는 아이들은 삼삼오오 대열을 정비한다. 사진기사의 이러저러한 포즈 요구가 들려온다.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발을 씻기 위해 수돗가로 이동하는 무리의 얼굴에는 흥겨움 대신 여름 볕에 지친 표정이 한가득 잡힌다.
어느 ○○유치원에서 진행한 이른바 ‘생태체험학습’의 하루를 실제로 담은 이야기다. 맨 앞줄에 섰던 청년은 어느 행사 대행 이벤트업체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유치원이 이러한 자연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체험학습은 사진을 찍어 보여주며 단지 학부모에게 확인을 시켜주기 위한 형식적인 요식 행위나 다름 없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갯벌의 소중한 생명체를 가지고 놀다가 버릴 수 있는 장난감 정도로 인식하게 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제공한다. 나무의 광합성이 없었다면 아마 지구상에 생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체험은 이러한 자연의 고마움과 재미와 감동을 감성의 자극을 통해 깨닫게 하는 행위다.
또한 나무와 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존중할 줄 아는 아이들이 되도록 도와주는 행위이며, 이기적인 물질문명에 길들여지는 미래세대에게 자연과 인간이 공생해야 한다는 자연관을 갖도록 보조하는 행위인 것이다.
자연체험은 이벤트가 아니다. 자연체험은 살아 있는 생태적 감수성의 호소이며 경이로운 자연과의 교감(Communication)이다. 자연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환경교육 현장은 앞서와 같은 이벤트 방식에서 철저히 탈피하지 않으며 안 된다.
사실 현재 자연체험을 통한 환경교육이 많은 단체와 기관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담당 실무자들에게서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개념과 철학이 담긴 답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지난해에 했으니까 올해도 한다.” “뭔가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데도 다 하는데 우리도 해야지.” 등. 물론 모두라 하긴 어렵지만 체험환경교육을 하나의 이벤트로 보는 경향들이 많다고 느꼈다.
활동을 주최하고 있는 주체들의 이러한 마인드는 자연스럽게 환경교육 프로그램의 ‘품질 저하’ 또는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라 하지만 자연 현장에서 대규모 집단 대상의 활동으로 인해 자연을 파괴하는 현상, 자연공작 또는 체험을 위한 지속적·집중적 자연물 채집 등 환경교육의 목적에 반하는 왜곡된 교육이 일어나고 있다.
프로그램의 내용과 운영도 많은 부분들이 단편적이거나 일방적인 전달방식이 많다. 어떤 교육을 보면 ‘저 교육이 자연체험교육인지 식물분류학 시간’인지 알 수 없고, 자연에 대한 본성에 접근할 기회를 갖기보다는 자연물 각 개체에 대한 피상적 지식을 일방적으로 많이 전달하는 것이 능력 있는 환경교육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일례를 들면 숲이 잘 가꿔진 수목원이나 휴양림에 갔을 때 주로 이뤄지는 내용은 교사나 지도자, 혹은 외부 초청 전문 강사가 참가자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이 나무는 언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이름은 무엇이다” 등 대상에 대한 지식을 위주로 전달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감수성을 강조하는 체험환경교육의 본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 또한 체험환경교육은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정보·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자연~역사~문화의 연결고리 속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과정이다.
자연 속에서 직접 체험 위주의 학교를 운영하는 독일 북부 브레멘시 프린츠호프텐 자연대안학교의 교육은 이런 점에서 체험환경교육의 기본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떤 아이에게도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받지 않고 배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학교의 특징이다. 우리가 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볼프강 유첸펠트 교장의 말처럼 프린츠호프텐 교사들은 ‘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교육’ 대신 ‘동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교사들 스스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지도자라는 개념보다는 아이들과 동행하는 조력자, 동반자, 협력자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A는 B다’라고 정의를 내려 전달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이들이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원리를 탐구하며 그 과정을 거쳐 결과를 도출해낼 때까지 기다려주며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내적동기를 통해 자가획득하는 학습방식을 택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학교 학습구조와는 너무 달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러한 학습방식은 이제 선진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가고 있다.
이미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도 이러한 학습법이 미래세대 인재를 길러내는 데 유용하다는 결과가 증명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당장 우리의 제도권 교육 내에 도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교육’의 의미가 ‘가르치다’ ‘지도하다’에서 ‘스스로 깨닫게 하다’ ‘북돋게 하다’라는 의미로 새롭게 정의하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교육현장에서의 과제임은 분명한 것 같다.
‘동행’이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교사와 아이들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기사입력 :2007-02-13 오후 1:22:22
2007/02/13 [03:53] ⓒ k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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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만홍 사무처장(환경교육연구지원센터) 박순주 psj29@hkbs.co.kr
생태 체험학습 주체를 망각한 행동
자연체험 이벤트성 도구화 ‘주객전도’
지난해 여름 대부도 갯벌에는 한 무리의 유치원 아이들이 올망졸망한 모습으로 한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를, 다른 한손에는 아이들이 조금 버거워 보이는 호미를 들고 나타났다.
초등학교 한 반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두 명씩 짝을 짓고 길게 서서 줄 맞춰 갯벌로 이동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맨 앞에는 큰 삽을 든 건장한 청년이, 맨 뒤에는 치마 입고 화사함을 자랑하듯 옷맵시가 한껏 돋보이는 교사로 보이는 여성이 동행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지시하는 모양새를 보니 담임교사임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은 신발을 신고 줄 서서 갯벌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앞줄 건장한 청년의 지시에 따라 갯벌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열심히 호미질을 해댄다. 어떤 아이는 호미가 무거운지 그냥 내버려둔 채 펄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어떤 아이는 마치 무언가에 보복이라도 하듯 열심히 호미로 펄을 내리치고 있다.
아이들도 스트레스가 쌓이니 아마도 해소 차원이겠지 하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담으려고 가져왔는지 모를 까만 비닐봉지는 그냥 갯벌에 내팽개쳐진 채 개흙으로 범벅이 돼 갔다. 유심히 보니 앞장서 가던 삽을 든 청년이 연방 땀을 흘리며 갯벌에 대고 삽질을 하고 있다. 조개 등을 캐기 위한 행위일 거라 짐작은 가지만, 조개가 그리 쉽게 발견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청년의 삽질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30여 분이 지나니 담임교사가 옷에 펄이 묻을까봐 조심스레 아이들에게 다가가서는 나가자고 이끈다. 펄에 내팽개쳐진 비닐봉지를 그대로 둔 채 나오는 아이들은 삼삼오오 대열을 정비한다. 사진기사의 이러저러한 포즈 요구가 들려온다.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발을 씻기 위해 수돗가로 이동하는 무리의 얼굴에는 흥겨움 대신 여름 볕에 지친 표정이 한가득 잡힌다.
어느 ○○유치원에서 진행한 이른바 ‘생태체험학습’의 하루를 실제로 담은 이야기다. 맨 앞줄에 섰던 청년은 어느 행사 대행 이벤트업체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유치원이 이러한 자연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체험학습은 사진을 찍어 보여주며 단지 학부모에게 확인을 시켜주기 위한 형식적인 요식 행위나 다름 없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갯벌의 소중한 생명체를 가지고 놀다가 버릴 수 있는 장난감 정도로 인식하게 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제공한다. 나무의 광합성이 없었다면 아마 지구상에 생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체험은 이러한 자연의 고마움과 재미와 감동을 감성의 자극을 통해 깨닫게 하는 행위다.
또한 나무와 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존중할 줄 아는 아이들이 되도록 도와주는 행위이며, 이기적인 물질문명에 길들여지는 미래세대에게 자연과 인간이 공생해야 한다는 자연관을 갖도록 보조하는 행위인 것이다.
자연체험은 이벤트가 아니다. 자연체험은 살아 있는 생태적 감수성의 호소이며 경이로운 자연과의 교감(Communication)이다. 자연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환경교육 현장은 앞서와 같은 이벤트 방식에서 철저히 탈피하지 않으며 안 된다.
사실 현재 자연체험을 통한 환경교육이 많은 단체와 기관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담당 실무자들에게서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개념과 철학이 담긴 답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지난해에 했으니까 올해도 한다.” “뭔가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데도 다 하는데 우리도 해야지.” 등. 물론 모두라 하긴 어렵지만 체험환경교육을 하나의 이벤트로 보는 경향들이 많다고 느꼈다.
활동을 주최하고 있는 주체들의 이러한 마인드는 자연스럽게 환경교육 프로그램의 ‘품질 저하’ 또는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라 하지만 자연 현장에서 대규모 집단 대상의 활동으로 인해 자연을 파괴하는 현상, 자연공작 또는 체험을 위한 지속적·집중적 자연물 채집 등 환경교육의 목적에 반하는 왜곡된 교육이 일어나고 있다.
프로그램의 내용과 운영도 많은 부분들이 단편적이거나 일방적인 전달방식이 많다. 어떤 교육을 보면 ‘저 교육이 자연체험교육인지 식물분류학 시간’인지 알 수 없고, 자연에 대한 본성에 접근할 기회를 갖기보다는 자연물 각 개체에 대한 피상적 지식을 일방적으로 많이 전달하는 것이 능력 있는 환경교육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일례를 들면 숲이 잘 가꿔진 수목원이나 휴양림에 갔을 때 주로 이뤄지는 내용은 교사나 지도자, 혹은 외부 초청 전문 강사가 참가자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이 나무는 언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이름은 무엇이다” 등 대상에 대한 지식을 위주로 전달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감수성을 강조하는 체험환경교육의 본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 또한 체험환경교육은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정보·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자연~역사~문화의 연결고리 속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과정이다.
자연 속에서 직접 체험 위주의 학교를 운영하는 독일 북부 브레멘시 프린츠호프텐 자연대안학교의 교육은 이런 점에서 체험환경교육의 기본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떤 아이에게도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받지 않고 배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학교의 특징이다. 우리가 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볼프강 유첸펠트 교장의 말처럼 프린츠호프텐 교사들은 ‘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교육’ 대신 ‘동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교사들 스스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지도자라는 개념보다는 아이들과 동행하는 조력자, 동반자, 협력자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A는 B다’라고 정의를 내려 전달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이들이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원리를 탐구하며 그 과정을 거쳐 결과를 도출해낼 때까지 기다려주며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내적동기를 통해 자가획득하는 학습방식을 택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학교 학습구조와는 너무 달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러한 학습방식은 이제 선진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가고 있다.
이미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도 이러한 학습법이 미래세대 인재를 길러내는 데 유용하다는 결과가 증명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당장 우리의 제도권 교육 내에 도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교육’의 의미가 ‘가르치다’ ‘지도하다’에서 ‘스스로 깨닫게 하다’ ‘북돋게 하다’라는 의미로 새롭게 정의하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교육현장에서의 과제임은 분명한 것 같다.
‘동행’이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교사와 아이들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기사입력 :2007-02-13 오후 1:22:22
2007/02/13 [03:53] ⓒ k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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