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교육편지(제32호)
생태적 삶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
윤상혁
저명한 문화역사가이자 저술가인 게리 윌스는 자신의 책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에서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사실,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권력화하여 예수를 자신의 입맛대로 왜곡하고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생태, 혹은 환경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 와서인지는 몰라도, 주류의 기독교계는 지금껏 자본 및 자본가의 이익에 철저히 부합하는 자본의 청지기 노릇을 마다하지 않아왔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생태적 삶을 실천했던 예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농부와 농촌의 일상에 비유한 예수님의 생태적인 표현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표현 속에 흙과 자연, 식물과 동물은 매우 흔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부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도래할 것임을 예언하는 내용으로 해석되는데 그쳐왔습니다. 즉,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의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바로 그 때가 추수할 때, 즉 심판의 때라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없습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좋은 곳일 거라는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전까지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노력하는 많은 이들에게 혼란을 줍니다. 이에 대해 프란츠 알트는 <생태주의자 예수>에서 다음과 같이 한 가지 힌트를 제시하였습니다.
"태양은 '저절로' 빛나고 바람은 '저절로' 불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저절로' 정화되며 나무와 식물은 '저절로' 자란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남자들에게 '받아들임'이라는 이 여성적 미덕이 아주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남자들이 산업사회의 발전을 여전히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자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만들고, 또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저절로' 다가오는 태양, 바람, 물이야말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저 불안한 핵 쓰레기, 공기 오염, 물 오염, 숲 파괴, 토지의 산성화와 같은 부작용을 낳지 않는다(82쪽)."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프란츠 알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저절로(스스로)'라는 단어에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작용을 낳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면서 부작용이 발생하였습니다. 태초에 아담이 그랬듯이, 지금의 우리도 선악과를 먹으라는 사탄(=우상=탐욕=물질)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에덴 동산으로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으로의 귀환이란 청지기적 삶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과 땅과 바다를 잘 가꿔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지기의 삶입니다.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나는 생태적인 표현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매우 한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확장되는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양적인 성장'으로만 해석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적인 변화'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예수를 비롯하여 위대한 다른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자주 식물에 비유해서 설교한 것은, 오직 식물만이 모든 의미에서 인간의 물질적인 조직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인 삶을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식물의 셰계만이 물질적인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원한 삶을 보장해줄 수 있다. 부활에 대한 모든 신앙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식물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89쪽)."
추운 겨울을 이겨낸 식물의 부활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가혹한 추위 속에서 죽은 듯이 보였던 식물들이 따뜻한 봄이 오면 어김없이 '부활'합니다. 놀라운 일은 또 있습니다. 식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입니다. 즉, 식물은 광합성 작용으로 말미암아 무기물을 유기물로, 무생물을 생물로, 비활성 물질을 생명체로 바꾸는 일이 가능합니다. 예수는 씨앗의 힘이 얼마나 센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식물의 생명력과 자연의 순환의 원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나눔의 원리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을 읽어봅시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는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알려져있는 이 대목에 대해 어떤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이적사건으로 보지않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나눔의 모범을 보이자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떡과 물고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 견해에 공감하는 바, 예수께서는 기적이 없이도 나눔의 실천을 통하여 그 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 모범은 그대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누던 예수의 모습.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생태적 삶의 모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
'환경생태, 기행 > 생태, 환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환경 운전 실천 100만인 서명 (0) | 2009.01.21 |
---|---|
국내 최초의 천문 프로그램 - 별바라기 1.0 (0) | 2009.01.04 |
생명평화를 위한 실천 (0) | 2008.10.13 |
코스모스는 왜 코스모스일까요? (0) | 2008.09.20 |
친환경 운전법 - 연간 500리터 절약 (0) | 2008.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