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교육강좌
생명평화를 위한 실천
김종철
정리 윤상혁
지난 9월 25일(목)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제4차 초록교육강좌가 열렸습니다. 김종철선생님(녹색평론 발행인)을 모시고 '생명 평화를 위한 실천'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강좌에는 이십여명의 초록교육연대 회원 및 일반인들이 참여하여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열린 초록교육강좌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회 강좌 : 고춘식(전 한성여자중학교 교장) / 한국교육의 역설
제2회 강좌 : 이수재(녹색아카데미 운영위원) / 광우병, 무엇이 문제인가
제3회 강좌 : 노회찬(진보신당 공동대표) / 진보진영이 나아갈 길
아래 내용은 강의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의회 민주주의는 거짓된 민주주의이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며, 가능한 것은 오직 대의제 민주주의뿐이라는 생각에 길들여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이며 건국의 주역 중 한명이었고,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메디슨이 “정부의 기능은 소수의 부자들을 다수의 인민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표현한 바 있듯이, 민주주의가 원래 민중에 의한 자치를 뜻하는 것이라면, 민중 자신의 삶에 관한 결정권을 이른바 정치 엘리트들에게 위임하도록 고안된 제도가 결코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현실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 이외의 틀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필요한 것은 이 제도가 민중의 자치욕구를 조금이라도 더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비판하는 일일 것입니다.
지난 5월 이후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는 바로 그동안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명백히 실패했음을 증언하면서, 동시에 이 나라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저 역시 촛불집회에 열다섯 번 나갔었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좋더군요. 생면부지의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 촛불을 들고 즐겁게 집회를 벌이는 모습은 진실로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촛불집회를 통해서 분명해진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와 인간다운 존엄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촛불집회의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결연한 자세에서 비롯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의 자세가 지배세력에게 달가울 리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민중의 살아 있는 정신과 민주적 에너지는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임이 분명한데도, 지금 권력은 민중의 에너지를 전방위적으로 억압하고 탄압하는 데 광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당분간 선거가 없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선거가 아니라도 투표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정의와 공공성을 우습게 여기는 자본과 국가 및 언론권력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상품과 서비스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투표 행위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표 행위의 일상적 실천이야말로, ‘자유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손쉬운, 그러나 가장 효과가 확실한 비폭력적 저항운동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화로 비롯된 미국의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미국의 5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했습니다. 메릴린치는 매각되었고, AIG에는 어마어마한 공적자금이 투입되었습니다. ‘편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입니다. 공적자금이 무엇입니까? 국민의 세금 아닙니까? 이익을 얻을 때는 모든 것을 자신의 덕으로 돌리다가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국민에게 손을 벌리는 재벌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우리는 인식해야만 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을 때, 최대의 수혜자는 누구였나요? 기업 아닙니까? 일종의 보조금인 셈인데, 과연 기업들은 국가의 지원을 통해 얻은 자신의 이익을 사회에 얼마나 환원했나요? 기업들이 ‘시장만능주의’를 부르짖고 있는데, 저는 차라리 진짜 시장만능주의를 한다면 지금의 상황보다 더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위험에 빠진 기업을 살리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국민의 세금을 거두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과연 시장만능주의일까요? 자본주의는 태생부터 ‘국가자본주의’였습니다.
교원평가제에 반대한다
모두가 진보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진보진영이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가치들을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이 마치 어른스러운 태도인 양 말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교원평가제만 해도 그렇지요. 전교조를 향하여 “교원평가를 무조건 반대하지만 말고 받아들여라. 국민들이 원하지 않느냐. 전교조가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진보를 위한 고언(苦言)인양 여기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원평가에 대해 반대합니다. 저는 자유인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육에, 교사에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유로운 인간을 키워낼 수 있겠습니까. 교육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교사에게 교권을 주었으면,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교육을 맡겨야지,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점수화하겠다는 발상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교사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교직사회에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금 떨어지고 부족한 사람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 아닙니까?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요. 책을 잃어버릴까봐 도서관 문을 닫으면 되겠습니까? 빈대 한 마리 없애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격입니다.
민병산 선생에 대하여
며칠 전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지금 민병산 선생의 20주기를 기념하는 서화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민병산 선생은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충청북도 제일의 부호였습니다. 민병산의 큰 할아버지는 구한말에 괴산군수와 청주군수를 지낸 민영은(閔泳殷)이었으며, 아버지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엘리트였습니다. 그 또한 문예에 대한 조예가 깊어 7~80년대를 풍미한 문인들 중에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문학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지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무소유의 자유인이었습니다. 대부호의 장남이었지만,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으며, 혼인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직장에도 매인 적 없이 오직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생애 후반부에는 그만의 독특한 서체로 붓글씨를 써서 개인전도 열고 교유하는 많은 예술 문화인들에게 자신의 글씨를 선물하기를 즐겼습니다. 평생을 그와 동고동락한 지인들이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큰 기념행사를 준비하였으나, 1988년 9월 19일 회갑을 하루 앞두고 타계했습니다. 글래서 일각에서는 민병산 선생께서 격식과 겉치레를 극도로 싫어한 나머지 회갑연을 앞두고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할 정도로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멀리 하셨던 보기 드문 우리 시대의 스승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노년에 접어들어 무소유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지만, 민병산 선생처럼 이십대 젊은 나이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무소유의 길을 걷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시간들 내셔서 경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민병산 선생의 서화전에 한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자유학원
일본의 자유학원을 아십니까? 건강한 자유인을 양성하기 위해 1921년 설립된 일본의 대안학교인 자유학원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는 ‘교사(校舍)가 아름다워야 한다.’ 둘째는 ‘학교의 중심에는 식당이 있어야 한다.’ 셋째는 ‘교과서가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합니다. 이 교육이념을 우연히 알게 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일본의 제국호텔, 낙수장,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설계하였으며 세계의 4대 건축가 중 한명으로 꼽힌다.)가 학교건물을 무상으로 설계해 주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학교를 보면, 군대와 병원, 그리고 교도소가 떠오릅니다. 감시와 통제의 관점에서 이 건물들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학교 건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자유학원은 또한 학교의 중심에 식당이 있어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 밥을 먹는다고 합니다. 일종의 밥상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데,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평등은 함께 밥을 먹는 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신분의 귀천에 따라 밥상을 따로 차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이 소외된 자들과 함께 밥을 먹은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당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세리, 창녀, 나병환자 등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천시하고 업신여길 때,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그들을 인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자유학원에는 또한 교과서가 없다고 합니다. 교과서는 국가가 교사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정해진 틀 없이 자유롭게 우리의 일상과 자연 속에서 배울 것을 발견해 내도록 해야 합니다.
자주적 공동체를 구성하자
나는 우리가 성장 논리에 맞서서, 우리 자신을 노예가 되라고 강요하는 시스템에 대한 단호한 저항과 불복종을 조직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맞설 수는 없는 일이죠. 간디가 영국산 직물 대신 인도 사람들이 스스로 물레를 돌려서 옷을 손수 만들어 입는 방식을 통해서 보여준 ‘보이콧’의 정신과 방법에 따라,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의 공간을 넓혀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선 생각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연대와 협력의 네트워크를 형성해가야 합니다. 초록교육연대도 결국 그러한 뜻을 같고 모인 단체가 아닙니까? 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포함한 생활협동조합 운동, 대안학교 운동, 지역화폐 운동, 도시농업 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회정의와 공공성을 우습게 여기는 자본과 국가 및 언론권력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상품과 서비스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투표 행위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촛불집회를 통해 발전된 ‘조중동’ 불매운동이나 광고주 압박운동 등은 민중의 살아 있는 정신과 민주적 에너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투표 행위의 일상적 실천이야말로, ‘자유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손쉬운, 그러나 가장 효과가 확실한 비폭력적 저항운동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즐겁게 연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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