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우주를 만나다 -- 복효근 시의 근원 남원 운교리
- [전라도닷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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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효근 시인이 부리는 언어는 모두 남원 운교리의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다. 운교리 들녘에 선 복효근 시인. |
ⓒ 전라도닷컴 | 복효근 시인이 부리는 언어는 면밀히 따져보면 그의 것이 아니다. 먼발치에서 노고단을 올려다보는 고향 운교리의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어머니의 살아있는 말씀들이 그대로 시의 형태로 차용되고 있을 뿐이다.
운교리의 땅에서 복효근이 자라던 시절 어머니가 그에게 불쑥 던지던 말들은 모두 시어였다. “나무를 하러 갔다온 어머니는 ‘너네들 생각해서 어린 나뭇가지는 절대로 손대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생각하면 그 말들 속에 시가 담겨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식물성의 언어로 채워진 시집 복효근의 시는 대부분 자연을 통한 인간의 성찰을 담고 있다. 모든 시집은 식물성의 언어로 채워져 있으며 시의 면면에서는 작은 꽃씨 하나만 떨어져도 세상이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그리고 그 언어들은 대부분 고향 운교리를 채우고 있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이다.
첫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에서부터 가장 근자에 나온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까지 4권의 시집을 묶어 내는 동안 그의 시가 걸어온 궤적은 언제나 운교리의 땅과 겹쳐 있었다.
단지 시뿐만 아니라 그가 평생에 걸쳐 살아온 공간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나이 사십이 넘은 복효근이 고향을 떠나 산 시간은 고작해야 10년을
넘지 않는다. 고등학교와 대학 그리고 초임교사 시절 인천에서 살았던 3년을 제외하고 나면 그는 언제나 고향 남원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 지향하는 삶 자체가 도시적인 것들과는 일정 부분 괴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화장실도 없는 이 전차 속에서/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한사코/ 오줌이 마렵고 내리고 싶다/ 앞으로 나아갈 줄밖에 모르는/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끈기가 늘 부러웠다/ 열차 위엔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고/ 멈추어진 역마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자꾸만 안전선 뒤로 물러서라 했다> (‘전철속에서 1’ 부분)
도시의 삶 속에서 그가 느낀 것은 실체는 없고 목소리만 남아 있는 인간형과 앞만 보고 내달리는 시스템에 대한 혐오다. 심지어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책마저도 목소리만 있을 뿐이다. <아는 사람도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에서 <앞으로 나아갈 줄밖에 모르는> 것은 지하철만이 아니다. 도시의 현장에서 살아내는 사람 모두가 시선을 뒤에 둘 줄 모른다. 언제나 지나온 자리가 더 밟히는 그에게 도시는 근본적으로 닫힌 문이었다.
어머니는 살아있는 시어 복효근에게 고향 운교리는 삶의 진실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키운 고향의 생명력 안에서 시의 화두를 건져 올린다. 운교리 논둑길을 거닐며 그는 이슬 한방울이 달빛을 궁글리는 모습을 만나고, 산 속에 들어 겨울에도 잎을 매달고 서 있는 떡갈나무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 모든 발견의 핵심에는 언제나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서 있다.
<오래오래 살 집 아니라고/ 화초 한 포기 심지 않고 지내는데/ 햇살 따사로운 봄 아침/ 오랜만에 찾아온 칠순의 어머니/ 어디서 나오는 근력인지/ 손바닥만한 전셋집 마당에 삽질을 했다/…/ 푸른싹들이 송긋쏭긋/ 마당을 덮는 것이 도통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거칠은 땅 한 조각 일구어/ 푸새것들 가꿔내는 일과/ 우리들 새끼 낳고 가르는 일 사이/ 어머니 넌지시 감춰놓은/ 묘한 그 비유법> (‘전셋집 마당에 상추를 심다’ 부분)
집안 살림은 거들떠보지 않았던 아버지 탓에 매일 논밭으로 나가 집안의 경제를 책임졌던 어머니가 복효근에게 가르쳤던 것은 단지 생명의 힘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남의 땅에 상추며 아욱을 심는 행위 안에는 세상의 모든 대상을 모성의 사랑으로 보듬어 안으려는 뜻이 깃들어 있다.
복효근의 어머니가 혼자 기거하고 있는 운교리의 고향집에는 마당이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당이 있던 자리를 텃밭이 대신 채우고 있다. 그 안에는 철마다 상추며 고추가 자라고 흙돌담으로 호박이 넝쿨을 뻗는다. 돌담에는 호박잎이 담을 잘 타고 넘도록 대나무가지들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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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효근의 어머니 집에는 마당 대신 텃밭이 있다. 시인은 그 텃밭에서 우주의 근원을 만난다. |
ⓒ 전라도닷컴 |
텃밭 속에 우주가 담겨 있고 <폐차는/ 부활 같은 건 꿈꾸지 않나보다/ 쓸 만한 부품은 성한 놈들에게 내어주고/ 폐차장엔 끝끝내/ 끌고 온 길들을 놓아주어버린/ 분해되는 낡은 차가 그래서 평화스럽다/ 영생은 믿지 않아/ 벌써 윤회가 시작된 것일까/ 나팔꽃 한 가닥이 기어올라 안테나에 꽃을 피웠다/…/ 폐차는 성자처럼/ 나팔꽃이 시들 때까지만/ 지상에 남아있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폐차와 나팔꽃’ 부분)
어머니의 심성 때문일까, 복효근은 작은 텃밭에서 희생 안에 담긴 비밀을 읽어냈다. 폐차가 그의 눈에 들어온 이상 그것은 이미 폐차가 아니다. 폐차는 세상 모든 희생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며 복효근에게는 어머니의 일생이기도 하다. 다 내어주고도 부족해 나팔꽃이 시들 때까지를 기다리는 삶의 자세는 호박줄기가 잘 자라도록 대나무가지를 치는 어머니의 행위에서 차용된 발상일 터이다.
“어머니가 키우는 텃밭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텃밭에서는 매일 꽃이 피고 지고 작은 벌레들이 산다. 세상의 이치가 작은 밭 속에 모두 담겨 있다.”
운교리는 행정구역상 남원시 대산면 운교리이다. 원래는 남원군이었으나 시군통합이 이루어져 남원시로 편입되었다. 시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시골마을일 뿐 도시적인 냄새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들녘에는 이제 갓 무논으로 옮겨진 모들이 자라고 있고, 마을은 여느 시골처럼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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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교리의 땅은 지리산 노고단을 올려다 보고 있다. |
ⓒ 전라도닷컴 |
운교리에서 자라던 시절 복효근은 시인보다 화가를 꿈꿨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인근에서 개최되는 사생대회를 모두 휩쓸고 다녔을 만큼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살이 덕에 꿈은 쉽게 어긋났다. 화구를 살 돈을 구하지 못한 탓이다.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 충당해야 했던 대학시절부터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자연스럽게 시로 옮겨졌다. 그 이력으로 인해 그의 시는 일상을 세밀한 터치로 그려내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존재의 성찰 복효근의 시는 전통 서정시의 범주 안에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전통의 것을 뛰어넘는 의미들이 단단하게 박혀 있다.
평론가 전정구는 그의 시형식을 들어 “한국 서정시의 형식미를 계승해온 점도 있지만 그보다 내용미를 풍부하게 개척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복효근의 시에서는 잘 달여낸 녹차 향기 같은 탈속의 은은함이 묻어난다”고 평한 바 있다.
복효근에게 시가 간직하는 서정성은 그저 생태나 자연에 대한 예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생명의 깊이를 다시 의식 깊은 곳까지 끌어올려 인간의 근원적 삶과 접목시킨다. 때문에 그의 시가 남긴 파장은 깊고, 존재의 골을 때린다.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부분)
누군가의 목숨에 빚진 것은 단순히 누우들만이 아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 빚져 목숨을 연명한다. 그리고 가장 많은 목숨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복효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다. 식탁에서 만나는 무엇 하나 목숨 아닌 것들이 없다. 빚은 부채의식과 맞닿아 삶의 진정성을 일깨우는 힘이 된다.
<언젠가 단감을 깎아먹고/ 그 씨알 하나를 세로로 쪼개어본 적이 있다//…// 화살표 이 쪽으론/ 한 하늘 가득 창창히 뻗어오를 감나무의 전 생애와/ 한 그루 감나무가 걸어갈 수억 년이,/ 화살표의 저쪽으론 또/ 감나무가 걸어온 수억 년이/ 그 작은 씨알 속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 속에/ 수억 년 전의 감나무 아래서 감을 따는 나와/ 또 수억 년 뒤의 감나무 아래서 감을 따는 내가/ 태반 속의 아이처럼 매달려 있다> (‘씨알 속 우주 한 그루’ 부분)
생명은 순환하는 것이다. 오늘의 현재는 과거의 시간이 밀어 올린 것이며 앞으로의 시간을 예견한다. 단순히 단감을 깎아먹는 일상에서 복효근은 <태반 속의 아이처럼 매달려> 있는 우주의 근원을 포착해 낸다.
복효근은 어머니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마당의 텃밭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무수한 생명들의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을 터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이란 것도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완성된다.
▣복효근
복효근은 남원에서 태어나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남원에서 살고 있다. 평생을 문학판의 변방인 지역에서 살아온 탓에 복효근의 시는 성과에 합당한 평가를 얻어내지 못한 측면이 많다. 시골살이가 시 쓰는 행위 자체에는 축복으로 다가왔지만 평가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평가에 별반 개의치 않는다. 남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이 시 하나로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 시인 안도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효근은 예전에도 ‘정체를 숨기고 전교조 활동을 열심히 하던 현직 교사’였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론 여러 일면들을 따져보면 변한 것은 많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 테두리에 있었던 전교조는 이제 합법의 틀에 들어가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아쉽다. 해직이 됐어야 옳을 일인데 밥줄이 무서워 전향을 했다.” 복효근은 현재까지 그 미안함을 갚기 위해 지역의 아이들에게 열중한다. 지역은 문학판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변방이다.
복효근의 시는 삶의 작은 단면을 통해 전체를 통찰하는 힘을 지녔다. 평론가 유성호는 복효근의 시를 “생리적으로 소박하고, 애써 지은 표정이 없는 삶의 깨달음을 곡진하게 담고 있다”고 평했다. 그의 시에서는 억지로 짜 맞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일상의 발견으로 가득 차 있다.
복효근은 1991년 계간 《시와 시학》에 ‘새를 기다리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의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등의 시집을 묶어 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