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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불관용의 칼을 거두라...MB

두메풀 2009. 12. 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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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불관용의 칼을 거두라
한겨레 홍세화 기자
» 홍세화 기획위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논어에 나오는 말씀이다. 군자는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데 소인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불화한다는 뜻이다. 오늘 불관용의 전형을 뽐내고 있는 이명박 정권에는 ‘소인은 동이불화’라는 말조차 과분하다. 큰 차이가 아님에도 용인하기보다는 그것을 증폭하여 아예 억압·배제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이 정권의 ‘사회 사전’에는 불관용의 대명사인 강제퇴거, 연행, 구속, 파면, 해고, 손배 가압류, 민형사 소송밖에 없는 듯하다.

실제로 이명박 정권에게 그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공존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지 극복 대상일 뿐이다. 반대세력, 비판세력에 대한 철저한 배제 전략과 그 관철이 용산참사만의 일이 아니다. 철도공사노조, 공무원노조, 전교조 노동자들에게 그러하듯 모든 일터와 배움터에서 불관용이 관철되고 있다. 미디어법 관철에 담긴 뜻도 마찬가지다. 철두철미한 불관용 정권이 동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공권력에 의한 힘의 논리다. 그 앞에서 기본권과 사회정의의 요구가 압살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세상이 조용한가. 공권력의 힘으로 촛불을 잠재우고 온갖 으름장으로 철도노조 파업을 중지시키는 데 성공하여 세상이 조용한가. 용산 수사 기록 3000쪽을 끝내 내놓지 않지만 그래도 재판은 진행된다는 건가. 하지만 부글부글 끓는 몸에서 체온기를 떼어낸다고 열이 내리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불만은 밖으로 표현되지 못할 때 잠복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 비판세력, 반대세력이라는 이유로 극복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사회통합의 길은 막히고, 강요된 굴종과 잠복한 울분은 사회적 시한폭탄의 씨앗이 된다. 그것이 언제 임계점에 도달해 폭발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뿐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세력을 극복 대상으로 설정하는 데만 익숙하다. 나와 네가 다른데 그 다름을 서로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관계로 산 경험이 거의 없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아래 항일세력과 부일세력은 서로 극복관계이지 공존관계가 될 수 없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에 자리잡은 근대식 제도교육은 차이를 오로지 극복 대상으로 설정하도록 작용했다. 나라의 주체가 아닌 일왕에 충성하는 획일적 신민으로 훈육됨으로써 조선 사람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조차 용인할 수 없는 존재가 남을 공존의 대상으로 삼기 어렵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이다. 분단 상황은 차이를 오로지 극복 대상으로 규정하는 경향을 더욱 강하게 했다.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의 관계 또한 공존관계가 아니라 극복관계일 뿐이다.

이명박 정권에 공존의 미학까지 주문하진 않는다. 다만 반대세력, 비판세력을 용인하는 게 민주주의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나를 비판하거나 반대한다고 감옥에 가두고 파면하고 해고한다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실상 실용이나 선진화까지도 필요하지 않다. 사익만 추구하는 극우세력이 아니라면, 반대자·비판자와 공존하는 경험을 보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따라서 다름을 존중한다는 것은 내가 존중받기 위한 일차적 조건이며 나와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노력은 남과 더불어 사는 당연한 조건이다.

이명박 정권은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불관용의 칼을 거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칼은 기필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