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에 중독된 한국-15] 우리말글 존중의 삶
1교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벤또’를 까먹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벤또는 도시락이다. 그런데 도시락을 왜 벤또라고 했을까? 일본에게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은 결과였다. 다꾸앙이나 덴뿌라, 오뎅 같은 말을 쓴 것도 다 그런 탓이었다. 놀랍게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일본말들이 일상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잃어버린 우리말을 찾기 위한 노력은 우선 우리말 되찾기 운동으로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우리말 속에 잔존해 있던 일본말들까지도 솎아내었다. 하지만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국의 언어 일본어는 그만큼 깊이 우리 속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이제 벤또 대신 도시락, 다꾸앙 대신 단무지, 덴뿌라 대신 튀김이란 말들을 쓰고 있다. ‘국민학교’도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러나 2% 부족하다. 유감스럽게도 오뎅은 아직도 오뎅이다. 어묵 혹은 어묵꼬치로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한때 ‘가라오케’가 문제가 됐었다. 녹음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 혹은 부르는 곳을 가라오케라고 했다. 일본에서 시작된 가라오케가 우리나라에 상륙해 성업하면서 이 말이 문제가 되었고, 일본어잔재는 아니었지만 일본말이었기 때문에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방송에서는 금기어로 지정되었지만 대체할 마땅한 말이 없어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 ‘거시기’에서 한 잔 했지.” 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지만 자주 방송 사고가 발생했고, 우여곡절 끝에 ‘가요반주’로 순화되었다. 해방을 맞고 60여 년이 지났다. 일본어 잔재 청산은 성과도 있었지만 미해결된 것들도 많다. 이빠이, 시다바리, 나시, 후카시, 가오 같은 말들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 드물지만 다마네기(양파), 닌징(당근), 쓰메키리(손톱깎이), 앙꼬(팥) 같은 말들도 들린다. 게다가 최근에는 과거에는 전혀 쓰지 않던 ‘간지’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이 말은 그동안 방송이나 영화 제작 현장에서 전문 용어(은어?)처럼 쓰던 말이었는데 몇몇 방송종사자들의 부주의로 대중에게 전파된 것이다. 4ㆍ19기념행사에 참가한 어느 대학 대자보에 실린 “우리 문과대 깃발 정말 간지 나죠!”란 문구나 ‘노간지’란 말은 정말 기절초풍할 말들이다. 간지와는 상황이 좀 다르지만 몇 년 전부터 자주 쓰는 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쓰나미’이다. 쓰나미는 해일이다. 해일이라는 우리말이 엄연히 있는데도 왜 쓰나미라는 일본말을 쓰게 됐을까? 쓰나미를 퍼뜨린 장본인은 도대체 어느 나라 기상청이며 어느 나라 언론인가? 우리말 해일을 외면하고 일본말 쓰나미를 그대로 받아 써야 속이 시원한가? 쓰나미를 써야 실감이 날 것 같다고? 정말 웃기지 말라. 해일도 얼마든지 무섭다. 그러고 보면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어로 된 간판도 많이 생겨났다. ‘스시’나 ‘사시미’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지만 1990년대 초반쯤(?)에는 ‘로바다야키’라는 일본식 주점이 젊은 층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었다. 몇 년 전부터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도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일본식 빈대떡 집인 ‘오코노미야키’라는 것도 들어왔고,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어느 대학가에는 ‘코코로노 벤또’라는 가게까지 등장했다. 도시락에 명을 다했던 벤또의 부활이다. 더 큰 문제는 ‘부스러기 영어’의 남용이다. 영어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우리말 속에 영어 낱말을 군데군데 섞어 쓰는 것은 영어도 아니고 우리말도 아니다. 디스카운트와 서비스가 활개를 치는 바람에 에누리와 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살은 빼면 되는데 너도나도 다이어트에 목을 매며 S 라인을 꿈꾼다. 슬림해지길 원한다. “입어 봐도 될까요?”하면 될 것을 “트라이해 봐도 될까요?”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역시 사람은 북을 읽어야 해요.”란 어느 아주머니의 방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글쓴이만 슬픈가? 따지고 보면 모두 불필요한 말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글문화연대는 ‘동주민센터’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길거리에 널린 게 카센터요 스포츠센터라고 해도 정부 이름에까지 ‘센터’를 사용한다는 것은 국가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고 심각한 자기 부정이며, 우리말을 업신여기는 짓을 정부가 앞장서서 저지르는 만행에 다름 아니다. 국어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공무원 윤리강령을 한 번이라도 읽어 봤는지 준엄하게 묻고 싶다. 이미 엎질러진 물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고 국민을 섬기는 정부답게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잘못 낀 첫 단추는 다시 끼워야 한다. 최소한 정부 이름만큼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지어야 한다. 프렌들리니 원샷딜이니 하는 알쏭달쏭한 말들의 사용도 중지하고 한강 르네상스니 남산 르네상스니 하는 사업들도 이름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아무 생각 없어서 그렇지 우리말에 르네상스보다 좋은 말은 얼마든지 있다. 얼마 전에는 보건복지부가 노숙인과 부랑인을 통합하는 법정 용어로 ‘홈리스’를 쓰겠다고 해서 한동안 시끄러웠다. 노숙인과 부랑인이 적절하지 않다면 무숙자나 길거리족, 길잠꾼, 떠돌이 등등 적절한 우리말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다. 실제로 한글문화연대 누리집에는 며칠 사이에 수십 개의 이름이 제안되었다. 다행히 이 용어 통합 문제는 반대 운동 덕분인지(?) 보류되었다고 한다. 우리에겐 한국어가 있다. 고유 문자인 한글도 있다. 한글은 15세기에 이 나라를 다스렸던 위대한 군주 세종이 직접 창제한 표음문자로서 현대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우수함과 편리함을 인정받고 있다. 어떤 이는 세종을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로 추앙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종의 은덕을 입었고 한글의 혜택을 누려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컴퓨터와 손전화 등을 사용하면서 한글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말은 아름답고 한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말로는 우리말글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몸으로는 영어를 숭배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런 위선을 청산해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말글을 존중하고 애용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말글 존중의 삶이고 가장 우리다운 삶이다.
<이 글은 조선닷컴에서 기획한 연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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